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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htly Brief]다까하시 코레키요(高橋 是清)의 운명

페이스북 트위터 미투데이 구글 싸이월드 요즘 이공순 기자 [기사입력 2016-07-15 오전 4:41:07 ]

  • 이 사람의 삶과 업적의 영광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의 삶이 찬란하고, 죽음이 미소(微少)한 것은 그 업적이라고 불리는 것 때문에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가 펼친 정책은 세상을 재난으로 몰아넣은 것이었고, 그 위험 때문에 다까하시는 세상의 찬송을 받은 그 정책을 청산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낸 괴물은 이미 너무나 커버렸기 때문에 다시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그를 죽였다. 1936년 청년장교들의 친위 쿠데타로 대일본제국 재무장관이던 다까하시 코레키요는 살해되었다.

    그 정책의 이름은 오늘날 Quantitative Easing(양적완화, QE)라고 불린다.

    다까하시 코레키요(다까하시가 성이고, 코레키요는 이름이다. 서구에서 그를 코레키요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식 성명 표기법을 오독한 것이다)는 1854년 에도(도쿄)에서 막부 전속 화가와 어린 하녀 사이에 사생아로 태어났다.

    이후 하급 사무라이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사립학교에서 영어 공부를 했다.

    15살 나던 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막노동판을 전전하다가 1년만에 일본으로 돌아온다. 일설에는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갔으나 집 주인이 그를 노예로 팔아버려 갖은 고생 끝에 간신히 일본으로 되돌아 왔다고 전해진다.

    16살에 일본에서 영어 회화 선생이 되었고, 성인이 되어서 일본 교육성 하급 관료로 들어갔다. 농업 및 상무부 관료 생활을 거쳐 1892년 일본 중앙은행에서 근무했으며, 1898년에는 부총재 자리에 올랐다.

    그의 '재능'은 일본 중앙은행에서 발휘되었는데 러일 전쟁 시에 그는 미국의 금융자본가와 영국의 로스차일드가로부터 자금을 빌려 군자금을 조달했다. 그 공로로 1905년 상원의원이 되었고, 1911-1913년 일본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총재직 퇴임 후에는 페루의 광산 개발에 투자했다가 날려 먹었으며, 1918년 재무장관으로 다시 관계로 복귀했다. 1921년 7개월 동안 총리를 지냈으며, 다시 1927년부터 기시 정권 하에서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역사에 남게 된 것은 그의 영어 실력 때문도 아니고, 입지전적인 출세 때문도 아니다.

    그는 1930년 대공황과 만주사변으로 인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금 본위제를 폐기하고 재정 지출을 늘렸으며, 크레딧 조건을 완화하고 국가 부채를 중앙은행의 발권력으로 조달했다.

    그는 근대적 형태의 QE를 처음으로 시행했으며, 그 결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엔화 가치는 40% 하락했으며, 수출은 증가했고 재정 지출은 GDP의 50%에 달했으며, 일본 경제는 안정화되었다.

    실은 다까하시의 정책은 케인즈 이론에 앞서서, 케인즈주의를 가장 완벽한 형태로 실천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케인즈가 다까하시의 정책을 참조했느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아마도, 케인즈가 그 유명한 말, "길게 보면 우리 모두는 죽는다"(그러니 당장 눈 앞의 일만 생각하자)는 문구는 다까하시의 운명에 대한 교훈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문학적, 철학적 수준으로 따지자면, <Butch and Cassidy>를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고 번역한 우리네 영화 번역가들이 한 끗 높다.

    일본 중앙은행의 부채 조달 덕분에 일본 정부는 군사비 지출을 늘릴 수 있었으며, 그 결과가 괴뢰 국가인 만주국의 수립이었다.

    그러나 이는 일본만의 '특수성'은 아니다. 영란은행의 창설도 스페인과의 해전을 위한 전비 마련을 위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중앙은행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본의 태평양 전쟁 개시는 단순한 군국주의적 야망 때문은 아니다. 일본 내에서는 주전파와 반전파의 두 개의 노선이 대립하고 있었으며 각기 일본 경제에 대해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해법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 대자본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는데, 당시 일본의 재벌들은 국제 카르텔의 일원으로 일본 국가나 정치권의 이해관계와는 다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예컨대 일본이 전쟁을 하려고 해도 무기 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 제련소가 턱없이 부족했다. 일본 정부는 철강재벌인 미쯔비시에게 동 제련소 건설을 촉구했지만, 미쯔비시는 국제 철강 카르텔의 생산 설비 쿼터 결정을 추종하여 정부의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1938년에야 일본 해군성이 자체적으로 동 제련소를 건설하여 전쟁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양자의 차이는 넓은 의미에서는 글로벌리스트와 민족주의자들 간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미 당시부터 글로벌리스트들은 자국내의 이해관계를 따르지 않고 국제적인 동맹과 협약에 더 충실했다.

    그 결과로 대공황 같은 경제난이 발생했을 때에도 카르텔 내의 자체적인 이해관계 조정에 따라 자신들의 본국에 희생을 강요할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사적 권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즉, 자본은 이미 1930년대에도 '초국적'(multi-national)이었으며(19세기 후반부터 이같은 산업/금융 구조가 확립되었다), 다만 자본 분파들 사이에서 내수 시장에 더 큰 이해관계를 가진 쪽과 외부 시장에 더 큰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들 사이에 대립이 존재했을 뿐이다.

    다까하시의 비극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그는 QE라는 전무후무한 정책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일본 경제를 회복시켰지만, 그 '회복'은 전쟁을 통한 영토 및 자원 약탈에 의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무한히 영토와 자원이 늘어나지 않는다면, 즉 전쟁을 무한히 지속하지 않고서는 '회복'은 다시 물거품처럼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국가가 무한전쟁에 돌입할 수는 없다. 당시 일본의 산업생산력으로는 만주국과 한반도 식민지만으로도 더 이상의 팽창을 감내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일본 정부의 재정 지출 급증에 따른 일본 국채와 통화에 대한 의구심이 투자자들 사이에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 국채 시장에서의 자금 탈출과 통화 가치 폭락을 의미하기 때문에, 다까하시는 QE를 청산(unwinding)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QE 청산은 일본 정부의 재정 지출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 지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군사비였다.

    다까하시가 군사예산을 감축하려 하자, 이미 만주전쟁과 중국 본토 일부를 차지하면서 비대해진 군부가 반발했고, 다까하시는 군 최상층부는 설득할 수 있었지만, '대일본'의 환상에 고취된 청년 장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1936년의 친위 쿠데타(일왕 권력 강화를 주장하며 내각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는 이렇게 해서 발생한 것이었으며, 다까하시는 가장 주요한 타겟이었다.

    동시에 역사적 평가 상으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의외로, 아니 당연히,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많지 않다) 다까하시의 정책(QE, floating currency) 자체가 단지 내부적인 '결단'이 아닌, 국제자본들 사이의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흔적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1936-1937년을 전후한 각국의 unwinding 역시 국제자본들의 합의에 의한 '강요'였다는 의심들도 존재한다(그 결과가 다시 대공황으로의 회귀라고 할지라도).

    역설적으로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는 '명분'이 있었다.

    다까하시의 QE로 인해 가장 수혜를 많이 본 것은 일본의 재벌들이었다. 이들은 엔화 약세로 앉아서 떼 돈을 벌었으며, 그 결과로 빈부격차는 극심해졌고 사회 불안정은 커졌다.

    경제적으로도 인플레이션이 폭발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청년 장교들의 눈에는 다까하시는 재벌들의 앞잡이였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밥줄을 위협하는 검은 손이었고, '천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천민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들 친위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면서, 그리고 QE 청산에는 엄청난 정치적/체제적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우려한 신임 도죠 내각이 QE 청산 계획을 포기하면서, 일본에서는 군사비 증액, 재정 지출 증가와 더불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도래했다.

    즉, 청산할 수 없는 QE의 최종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QE 청산이 불가능해진 일본은 군국주의로 한걸음 전진했으며 내부 동요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기 위해 해외 침략에 본격적으로 나섰고(1937년 중국 침략), 남지나해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자 미국과 영국이 저지에 나섰다.

    그 결과가 일본의 하와이 선제 공격에 따른 태평양 전쟁이었다. 다른 말로 해서,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은 다까하시의 감당할 수 없는 정책의 국제 정치적 결과였던 것이다(동시에 이는 미국의 일본에 대한 디플레이션 강요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같은 사정은 독일도 다르지 않았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독일은 인종주의(민족주의)나 당면한 경제난 때문에 2차 대전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독일은 30년대 공황과 은행파산의 결과로 금이 빠져나가자 일본과 마찬가지로 순수 신용화폐로 전환했으며, 그 덕분에 대공황에서 탈피하여 경제가 '정상화'되었다.

    그러나 독일 역시 일본과 동일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1936년 당시 이미 독일의 산업 생산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만일 이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독일에서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통화 긴축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독일 경제가 다시 침체에 빠지고, 이미 국채를 보증할 담보(금)이 없는 독일 마르크화에 대한 불신을 야기하며, 결국 다시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이 독일이 경기 정점기에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헝가리와 체코를 침공한 이유였다. 독일은 오스트리아 중앙은행의 '금'을 원했고, 체코의 '산업과 숙련기술자'를 원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소련 남서부의 원자재였고, 소련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후방인 프랑스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영국과의 평화협상이 선제적으로 필요했다.

    독일과 영국 사이에 뮌헨 협정은 이렇게 해서 맺어진 것이며, 독일은 영국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증으로 장거리 폭격기 개발 계획을 폐기했다. 2차 대전 초기에는 영국이 독일의 공군으로부터 안전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독일의 '인종주의'나 '반공', '광기'는 허언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은 미친 것이 아니라 절박했으며, 절박한 인간들은 해서는 안되는 짓을 저지른다.

    1930년대 대공황을 '화폐'로 처방하려던 시도들은 이 화폐들이 인플레이션으로 전화하면서 다시 그 해법을 '외부'(침략전쟁)에서 찾으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우리가 인간의 '야욕'으로 부르는 전쟁과 침략의 배후에는 화폐의 야욕이 존재하며, 그 야욕을 부추긴, 지옥의 문을 연 중앙은행들이 존재했고, 그 중앙은행들을 움직이는 금융 자본이 존재했다.

    다까하시의 QE가 만들어낸 국가인 만주국은 한국과 인연이 깊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을 체결한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다까하시가 살해된 1936년 만주국 정부의 산업부 차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40년 일본으로 돌아와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군수성 차관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도조 내각의 전쟁 준비에 반대하여 도조 내각 붕괴에 원인이 되기도 했다.

    기시가 만주국을 좌지우지할 당시 만주국 하급 장교로 임용된 사람이 박정희였다.

    그리고 당시 만주국 일대에서 독립군 소탕으로 악명을 떨치던 조선인으로 구성된, 만주국의 지휘를 받던 간도특설대의 고위 간부가 백선엽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간도특설대가 너무나도 잔혹한 짓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던 조선인들은 일본군보다도 간도특설대를 더 미워했다. 백선엽은 국군 창설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순반란 사건이 진압된 뒤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되어 있던 박정희를 구제해준 인물이 바로 백선엽이었다.

    박정희의 친형인 박상희는 손꼽히는 공산주의자였으며 1946년 10월 대구항쟁(대구폭동) 당시 경찰의 손에 사살되었다. 박정희가 여순반란사건에 가담한 것은 형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들이 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기시가 만주국 총무청 차장으로 재임할 당시 입안한 '산업개발 5개년 계획'과 유사하다. 그리고 백선엽은 6.25 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1970년대 중반 무렵,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가 진행되면서 친일 행각을 희석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그 중의 하나가, 박정희가 만주국 장교가 된 것은 사실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위장이었다는 주장인데, 엄하게도 이런 얘기가 실제 역사책으로 출간된 적도 있다.

    필자가 고등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을 읽었다(배를 잡고 깔깔 웃으면서 읽었다. 수업을 빼먹고 도서관에서 놀고 있었다는 게 함정). 심지어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사춘기 시절 워낙 영화를 좋아해서 닥치는대로 보다 보니, 우연히 걸려든 영화가 일본군 장교지만 실은 독립군이었다는 설정의 한국 영화였다(제목은 잊었다. 40년전 일이니 양해해 달라). 이 영화에는 정신대(위안부)도 나온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런 주장이 다시 제기된 것을 보고는, 이번에는 웃지 못하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이 정권이 일본과 손을 잡으면서 '반일' 박정희는 쏙 들어갔다. 인간들에게 '한계'란 없다.

    1982년 일본 중앙은행은 창립 100주년을 맞아 백서를 펴냈다. 이 백서에서는 다까하시의 QE를 "100년 역사에서 최악의 실책"이라고 평가했다.

    1983년, 벤 버냉키는 QE의 무한한 가능성을 예찬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출세작이다.

    2001년 버냉키는 "일본이 QE를 덜 해서 실패했다"고 질타했으며, 헬리콥터 머니를 제시했다.

    실은 다까하시의 QE는 오늘날의 '헬리콥터 머니'에 더 가까운 것이다. 2008년 이후의 QE는 재정 긴축을 동반하지만(따라서 인플레이션을 저지한다), 다까하시의 QE는 재정 확대와 양적 완화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경기는 빠르게 회복하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 압력은 누적된다.

    이것이 다까하시와 버냉키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버냉키는 QE3조차 감당하지 못해서 tapering을 했다. 이런 소심한 인간은 헬리콥터를 띄우지 못한다.

    동시에 여전히 헬리콥터를 입에 달고 산다면, 그는 자신의 손에 피는 묻히지 않은채, 수백만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Nightly가 버냉키와 오바마를 반인도주의 전범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버냉키는 경제사가로서 30년대 QE의 전말을 모르지 않을 것이며, 만일 모른다고 한다면, 아인슈타인의 '미친 놈' 정의에 따라서 정신병원에 강제 구금해야 할 것이다.

    아베의 자문관인 고이치 하마다는 버냉키의 일본 초청으로 헬리콥터 머니 논란이 불거지자, "만일 일본 중앙은행이 정부 부채들 조달하기 시작한다면, 재정 팽창이 통제를 벗어날 위험이 있다"면서 1930년대 재무장관이었던 다까하시가 부채의 화폐화를 추진한 결과를 환기시켰다(블룸버그통신).

    "다까하시의 강력한 정책은 일본을 대공황에서 탈출시켰지만, 이는 훗날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야기한 공격적인 군사비 지출을 향한 문을 열었다"고 하마다는 밝혔다.

    일본 정책결정자들도 헬리콥터 머니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알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만이, 그리고 국채 시장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만이, 즉 일본 통화(엔)에 대한 신뢰성이 보장될 수 있어야만이 헬리콥터 머니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헬리콥터 머니는 그 자체로 이같은 신뢰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따라서 헬리콥터 머니는 극단적인 정치적 위험, 즉 전쟁이나 전쟁에 준하는 지정학적 긴장 하에서만, 또는 그같은 상황을 각본에 두어야지만 가능하다. 이미 2차 대전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바이다.

    THAAD의 정치적 의미는 여기에 존재한다. 기시의 손자인 아베가 정권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전쟁은 없을 것이다. 다만 전쟁을 위한 '준비'만이 있을 뿐이다.

    아베의 정책이 모두 실패로 끝나는 순간(그리고 당연히 실패한다), 일본은 스스로가 불러온 침몰을 모면하기 위해 '위기'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씨앗은 이미 뿌려졌다.

    - 미국의 6월 생산자 물가가 시장 예상치(전달 대비 0.3% 상승)을 넘어서는 0.5%의 상승세를 보였다. 지난 5월치는 -0.1%였다. 근원생산자 물가는 0.4% 상승했다. 시장예상치는 0.1%였다.

    인위적인 디플레이션(ZLB) 하에서는 아주 낮은 정도의 인플레이션률조차도 경제를 뒤흔들만큼 위험하다.

    2007-2008년 중반까지의 생산자 물가는 연준이 속수무책이도록 높았다.

    이미 기저효과 때문에라도 미국 물가는 앞으로 계속 상승할 수밖에 없다. 생산자 물가가 상승하지만, 동시에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기업들의 가격 결정력이 낮아진다는 뜻이며, 이윤이 악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긴축을 하지 않고서는 기업 이윤 하락 현상이 지속될 것이다. 통화정책상 긴축을 하지 않으려면, 원가(원자재 가격)이 더욱 낮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달러화 강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달러화 강세 역시 미국 기업 이윤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1936년 긴축을 시도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인플레이션 조짐에 따른 통화가치 하락 우려 때문이었다. 지금도 하나도 다르지 않다.

    - 도널드 트럼프 미 공화당 대선 후보가 마이클 펜스 인디애나 주 지사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펜스 지사는 young republica revolution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며, tea party의 일원이다.

    정치적으로는 클린턴 일가에 대한 반감이 높은 보수세력을 결집하면서, 동시에 재정 적자를 늘려 인플레이션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득표력에 도움을 주는 선택으로 보인다.

    - BlackRock의 래리 핑크가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의 주가 상승은 brexit 투표를 앞두고 숏 포지션에 들어갔던 기관투자자들이 이를 청산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고 있다.

    오히려 채권펀드에 자금이 유입되고 있기 때문에 'risk-off'라고 주장한다.

    물론 단서가 붙는다. 그는 "기업들의 실적이 좋다면' 현재의 주가 수준이 정당화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4일 실적을 발표한 JP 모건이 시장 예상치를 크게 상회했기 때문에 시장은 마음놓고 달려도 된다.

    - 로이터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JP 모건이 이탈리아의 몬테 파스치 은행에 대해 70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지원키로 했다.

    몬테 파스치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부실 자산 가운데 가장 등급이 낮은 것은 은행구제펀드인 Atlante에서 매입하고, 그보다는 우량 자산은 JP 모건이 매입하는 방식이다.

    이는 중앙은행(ECB)나 국가가 직접 개입하지 않고 민간 자본의 힘으로 구제금융해 주는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지난 1998년의 Long Term Capital Management의 구제금융도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은 훗날 LTCM 사태를 거론하면서, 당시(1998년) 금리를 인상하지 않은 것을 실책이라고 후회했는데, 이 때 연준이 긴축 시기를 놓침으로써 IT 버블이 야기되었고 그 뒷수습을 위해 2003년 6월 1%까지 금리를 인하했다가 주택 버블로 금융 시스템이 붕괴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벌어졌다(필자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액수였던 36억 달러에 달하는 월가의 사적 구제금융의 댓가로 연준이 월가 은행들이 보유한 증권의 가치를 높여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추측한다).

    이번에는 유럽 은행시스템에 대한 월가 투자은행들의 private bail-out의 대가로 중앙은행들은 무엇을 약속해 주었을까?

    이탈리아 은행 섹터 지수와 도이치뱅크 주가는 급등했다.

    - 영란은행이 금리를 동결했다. 이코노미스트들은 "예상밖'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하루 앞서 13일 캐나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동결하면서 예상되었던 바다.

    영란은행은 현재의 파운드화 환율에서는 통화정책을 굳이 수정할 이유가 없다. 다만 8월 중 금리 인하 가능성은 높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현재의 가장 큰 위험은 globalization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의 위험은 globalization이 야기한 것이며, 이를 피하기 위해 민족주의로 돌아가는 것 역시 1930년대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또 다른 위험을 불러온다.

    엄밀히 따지자면 민족주의, 또는 고립주의는 globalization의 무한 팽창에 따른 당연한 반작용이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가도 동일한 지옥에 도착할 것이며, 이건 개와 돼지 사이에서 고르는 것만큼이나 불쾌한 선택이다.

    지난 6월말 발표된 BIS 연례 보고서(86차)에는 평소와는 다른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정책 조정의 필요성이 'urgent'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financial boom and bust를 저지하기 위해, 빨리 통화정책을 정상화하라는 주문의 강도가 아주 높아졌다.

    그러나 brexit를 이유로, 또는 이탈리아 은행 위기를 이유로, 또는 일본이나 중국도 유력한 위기 진원지이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만일 중앙은행들이 여기서 막지 않는다면, 세계는 2008년을 다시 보게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2008년은 2009년으로 이어지지 않고, 1939년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만일 중앙은행들이 팔짱 끼고 있다면, 또는 반globalist인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두려워 환각제를 다시 한번 불어넣으려고 한다면, 그 때는 우리는 아주 짧고 강력한 붐을 먼저 보게될 것이다. 골드만삭스의 기술적 분석팀은 S&P500 지수의 '2450'이 보인다고 말했다. 3000에 500원 걸 용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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