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Monitor

독일 정부 vs 독일 중앙은행 vs 이탈리아

  • Market Focus
  • 2012-08-07 05:25
  • (글로벌모니터 안근모 기자)
1. 1992년 조지 소로스를 필두로 한 글로벌 환투기 세력(?)들이 영국 파운드화와 이탈리아 리라화에 대한 매도공세를 본격화했다. 이들 국가의 인플레이션이 독일보다 훨씬 높은 상황인데도, 이들 통화는 유럽통화시스템(EMS: European Monetary System)에 의해 독일 마르크화에 고정돼 엄청나게 고평가 돼 있었던 탓이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독일이 외환시장에서 계속해서 마르크를 팔고 리라를 사들이는 개입을 하는 것. 하지만 이는 마르크화의 팽창과 독일내 긴축정책의 폐기 및 독일내 인플레이션의 용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92년 9월11일. 결국 독일 분데스방크는 용단을 내렸다. 헬무트 슐레징거 분데스방크 총재는 카를로 치암피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에게 전화를 걸어 "더 이상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분데스방크의 통화공급 정책 등 독일 국내의 목표에 반한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외환시장 개입을 중단할 수 있다"고 규정한 이른바 <에밍거 서한(Emminger Letter)>이 근거가 됐다. 이 서한은 EMS 체제 수립을 위해 협상을 하던 당시 독일 정부가 분데스방크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작성해 준 일종의 "보호장치"였다.

이탈리아는 결국 EMS를 탈퇴하고는 7%의 평가절하를 단행해야만 했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당시 이탈리아 재무부의 국장으로서 사태를 몸소 체험했다.

2. 지난 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통화정책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연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채를 매입하는 시장개입 프로그램(SMP)을 재개하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분데스방크의 바이드만 총재가 국채 매입에 유보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분명히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통화정책위원회)에 일인일표(a personal capacity)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망각돼서는 안된다."

분데스방크의 투표권은 한 표에 불과하며, 따라서 ECB는 다수결 투표를 통해 국채매입 프로그램을 관철시키겠다는 뜻을 드라기 총재가 밝힌 것이다.

그리고 6일, 독일 총리실의 게오르그 슈트라이터 부대변인은 드라기 총재에 대한 지지입장을 분명히 했다. "드라기 총재의 발표에 대해 우려하지 않는다. 드라기 총재는 지난주 유로 위기 대응에 있어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정책을 분명히 밝혔으며, ECB가 그들의 책무 범위 안에서 하는 모든 일에 대해 독일 정부는 의심하지 않는다. ECB는 독일정부의 지지를 획득해 있다."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의 고립이 보다 명백해 지는 순간이다. 이날도 분데스방크는 다우존스 기자에게 "우리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3. 독일 정부와 중앙은행간의 대립이 아주 생소한 것은 아니다.

지난 1990년 당시 독일 헬무트 콜 총리는 동독 마르크화를 서독 마르크화와 일대일로 교환하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분데스방크의 칼 오토 포엘 총재는 이 조치에 격렬히 반대하다가 결국 임기를 다 채우지 않은 채 사임했다.

현 바이드만 총재의 전임자였던 악셀 베버 총재도 지난 2010년 도입된 ECB의 국채매입 프로그램에 반발해 사임한 바 있다.

이보다 앞서 지난 1970년대 초에도 대립이 있었다. 당시 헬무트 슈미트 재무장관은 실업률을 5%로 끌어 내리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5%로 끌어 올리는 정책을 꾀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데스방크는 이에 대항해 1972년 12월부터 1973년 6월까지 재할인 금리를 무려 4%포인트나 인상해 버렸다.

4. 결국 바이드만 총재는 ECB의 제2차 SMP에 대한 표결에서 소수의견으로 남을 것인가. 그리고는 결국 사임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1992년 유럽 외환위기 당시, 또는 1972년 인플레이션 시대 당시의 총재들처럼 폭탄을 던질 것인가.

ECB의 정책회의가 개최되기 직전, 그리고 마리오 드라기 총재의 "런던 선언" 직후, 분데스방크는 자체 제작한, 의미심장한 인터뷰 기사를 홈페이지에 실었다. 이 기사에서 바이드만 총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유로시스템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중앙은행이다. 그리고 우리는 유로시스템의 다른 중앙은행들보다 훨씬 큰 발언권을 갖고 있다. 이 것은 우리가 그들과 다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드라기 총재가 자신을 "한 표"쯤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이.

시장을 움찔하게 했던 바이드만 총재 인터뷰 기사의 상대방은 헬무트 슐레징거 전 총재였다. 지난 1992년, 절벽 끝의 이탈리아의 등을 떼밀었던 바로 그 인물이다.

옌스바이드만독일중앙은행총재와헬무트슐레징거전총재가인터뷰를마친뒤기념촬영을했다.(출처:독일중앙은행)ⓒ글로벌모니터

옌스바이드만독일중앙은행총재와헬무트슐레징거전총재가인터뷰를마친뒤기념촬영을했다.(출처:독일중앙은행)ⓒ글로벌모니터

이미지 확대보기

5. 독일 정부와 분데스방크 간의 표면적 대립을 달리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IHS 글로벌인사이트의 티모 클라인 이코노미스트는 "독일 정부가 분데스방크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국채매입 프로그램에 제동을 걸려고 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런 해석대로라면, 드라기 총재의 이니셔티브(ECB의 스페인, 이탈리아 국채매입)의 앞날은 순탄치가 않다.

물론, 그렇게 "짜고 치기"라고 해석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성장을 중시하는 정부와 안정을 중시하는 분데스방크 간의 전형적인 대립양상이라고 보는 시각이 주류다.

댓글 작성

0/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