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Monitor

화폐가치 훼손(debasement)과 금(金)

  • Editor's Letter
  • 2020-06-20 06:57
  • (글로벌모니터 안근모 기자)
이란의 반미 시위대가 미국 성조기와 달러를 불태우고 있다. (블룸버그=글로벌모니터)

이란의 반미 시위대가 미국 성조기와 달러를 불태우고 있다. (블룸버그=글로벌모니터)

이미지 확대보기
오늘날 '화폐가치 훼손(debasement)'을 논거로 한 금(金) 가격 상승 또는 앙등론은 허구다.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돈키호테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현재 전개 중인 주요국들의 양적완화(QE)는 debasement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즉, 현대판 debasement 주장에는 base가 없다.

고대와 근대의 주화와 달리 현대의 화폐는 내재된 금속의 가치를 기반으로 발행되지 않는다. 금 또는 은 등의 정화(正貨) 준비금을 기반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정화로 태환해 주지도 않는다. 어빙 피셔는 이러한 "상환 불능의 지폐는 이를 사용하는 국가에게 거의 예외 없이 재앙이었음이 입증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피셔가 말했듯이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러하다.

현대의 화폐가치는 매우 낮은 인플레이션과 매우 비싼 국채가격이 보여주듯이 그 기반(base)이 매우 탄탄하다. 왜냐하면 현대의 화폐는, 사실은, 허공에서 발행되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금 가격은 오로지 실물의 인플레이션 환경에서만 부양받을 수 있다. 낮은 명목금리 환경이 시장의 동의 하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면, 이는 금 시장에 결코 호재이기 어렵다. 이는 오히려 금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환경(deflationary)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산가격의 인플레이션 역시 금 시장에 호재일 수 없다. 금은 자본자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자도 배당금도 임대료도 주지 않는 금은 '낮아진 할인율에 의한 자산 적정가치의 상승' 추세(Editor's Letter는 이를 '장기적으로 전개되는 자본자산의 re-rating'이라고 주장해왔다.)에 끼어들 수 없다.

debasement의 정의 및 역사적 사례

Debasement는 금속 주화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주화들이 역사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기원전 640년 무렵 서아시아의 리디아 왕국(터키 서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 주화들은 무게와 합금 구성비에는 일정한 규칙이 없었고, 그 표면에 어떠한 가치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주화가 무게로 표현된 가치, 계산 가능성, 운반의 용이성을 함께 지니게 된 것은 세계 최초의 대규모 임노동, 용병(傭兵)이 출현한 이후였다.

대규모 용병부대는 정복과 팽창을 위해 원정을 가는 일이 많았다. 전쟁을 치르러 다른 나라에 가는 용병들에게 정부는 그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운반 가능한 지불수단을 임금으로 지급해야 했다.

Debasement는 이처럼 주화가 널리 유통되기 시작한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Debasement란 주화에 내재된 금속(금, 은, 구리 등)의 함량을 줄이는 행위이다.

화폐발행권을 가진 정부가 debasement를 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차익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화폐를 훼손함으로써 정부는 보유하고 있는 금속에 비해 더 많은 주화를 발행해 지출을 늘릴 수 있다.

기원전 269년 로마에 데나리우스(denarius) 은화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이전에 동(銅)으로 주조된 화폐의 훼손이 시작되었다. 1파운드이던 동전의 무게가 로마제국 초기에는 1/2온스(ounce)로 줄었다.

데나리우스 은화와 BC 87년경 도입된 아우레우스(aureus) 금화는 오직 약간의 가치훼손을 겪으면서 네로 시대(AD 54년)까지 내려왔는데, 이때부터 주화에 대한 훼손이 본격화되었다. 금화와 은화의 귀금속 함유량이 계속 줄어들고, 다른 금속의 비율은 주화 무게의 3/4 이상으로 증가했다.

한때 순은이었던 데나리우스는 3세기 동안의 가치 훼손을 겪었다. 처음에는 동전에 얇게 은도금을 한 것이었다가 나중에는 주석을 도금한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데나리우스에는 원래 4.5그램의 은이 함유되었으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은 함량이 4그램으로 감소했다. 네로 황제기에는 은 함량이 3.8그램으로 낮춰졌으며 3세기 후반에 가서는 결국 은이 2%밖에 함유되지 않았다.

Debasement의 배경으로는 로마제국의 ‘과도한 영토 팽창’이 꼽힌다. 지중해 연안 지역을 넘는 곳까지 확장된 지역에서는 화폐 조세를 강제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로마로 되돌아오는 수입보다 군사적 팽창에 따라 나가는 지출이 더 커지게 되었다.

기원후 1세기의 로마제국은 낙후지역에까지 재정적 관계를 완전히 확장할 수 없었음에도 국가의 지출 용도로 쓸 주화의 필요량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그 소요를 충당할 귀금속을 확보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주화를 만들 때 들어가는 귀금속(특히 은)의 함량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주화가치 훼손은 국가가 명시적인 조세를 통해 지출의 재원을 충당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밀튼 프리드먼은 설명한 바 있다.

고대 및 근대의 'debasement'와 인플레이션

'가격혁명(인플레이션)'이 발생 중이던 16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그 원인을 둘러싸고 장 보댕(Jean Bodin)과 말레트르와(Malestroit) 사이의 논쟁이 있었다.

보댕은 스페인을 통해 대거 유입된 남미의 은이 당대 인플레이션의 주된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반해 말레트르와는 주화 debasement가 인플레이션에 상대적으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물가 통계는 말레트르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은 유입이 집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인플레이션은 가격혁명 기간 중 유럽에서 가장 낮았다. 스페인은 debasement를 겪지 않은 곳이었다. 반면 전쟁으로 인해 잦은 debasement가 시행되었던 합스부르그 저지대국(Low Countries, 네덜란드와 벨기에 등)에서는 인플레이션이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debasement가 인플레이션에 미친 충격은 크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로마의 경우 악화(惡貨) 발행의 효과는 아주 뒤늦게야 나타났고, 가격은 일정한 기간 동안 크게 오르지 않았으며, 현대의 정상적인 수준에 견주어도 크게 심각했다고 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기원후 200년을 100으로 할 때 로마의 물가가 5000으로 상승하는 데에는 한 세기가 걸렸다. 연평균 3~4% 수준의 인플레이션이다.

프리드먼에 따르면, 이처럼 debasement가 초인플레이션으로 발전하지 않은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Debasement에 아무리 비속한 금속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것을 생산하는 데에는 역시 그 비속한 금속만큼의 비용이 들기 마련이고, 그 비용으로 인해 화폐 발행을 늘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만약 이 악화들이 변함없이 조세 납부 때 액면가대로 인정되었다면, 귀금속 함량이 줄었다고 해도 반드시 가격에 영향을 줄 이유는 없다. 또한 상업적 거래에서도 돈을 주고받을 때마다 귀금속 주화의 중량과 순도를 정확하게 측정한 뒤 거기에 맞게 가격을 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프리드먼이 주장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한" 화폐는 debasement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간 동안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debasement 논란과 인플레이션

지난 3월23일 미국 뉴욕 상품거래소에서 금 선물 가격이 4% 이상 뛰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경제 침체와 금융시장 유동성 경색에 대응해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겠다고 발표한 뒤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 다음날에도 금 선물은 역시 4% 이상 급등했다. 골드만삭스가 고객들에 보낸 보고서에서 금 매수를 적극 추천한 영향으로 풀이되었다.

골드만삭스의 수석 원자재 애널리스트인 제프리 커리는 보고서에서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지위에 빗대어 "금은 화폐 debasement에 대한 헤지(hedge) 역할을 하는 최종 통화(currency of last resort)"라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것과 같은 충격에 대응해 중앙은행이 부양에 나설 때" 이러한 debasement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금 가격을 더욱 더 지지할 것이다. 지난 2008년 11월에 우리가 목격했던 것처럼 공포가 추동하는 매수세가 유동성 압박에 따른 매도 압력을 압도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커리는 19일에도 새로 보고서를 내 'debasement 공포'를 이유로 금 가격 전망을 상향했다. 3개월 전망을 1600달러에서 1800달러로, 6개월 전망은 1650달러에서 1900달러로, 12개월 전망은 1800달러에서 2000달러로 각각 높여잡았다.

보고서를 쓴 커리는 전통적인 개념의 debasement보다는 화폐 증발(增發)로 인한 통화가치의 신뢰 저하와 그에 따른 일반적인 인플레이션을 거론하고 있는 듯하다.

프리드먼에 따르면, 귀금속에 기반하지 않은 현대 불환화폐(fiat money) 제도에서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부 뿐이다.

예를 들어 미국 정부의 한 부처인 재무부가 국채를 확대 발행하고, 정부의 다른 부처인 연준은 이 국채를 매입함으로써 재원을 지원한다. 이 과정에서 화폐 발행이 증가하게 된다. 연준은 채권 매입의 대가를 재무부 명의의 연준 계좌에 입금한다. 그러면 재무부는 이 계좌에서 현금을 인출하거나 그 계좌를 근거로 수표를 발행해 정부의 지출대금을 지불한다. 이 대금을 처음 받은 사람들이 은행에 예금할 때 그 화폐는 은행의 지급준비금이 된다. 이 지준은 은행 대출의 씨앗으로 쓰이는데, 훨씬 큰 화폐량 증가의 단초가 된다. ☞ 관련기사: 이번엔 "not-monetizing"

실제 현대 중앙은행의 화폐발행 양상

최근 20년간 미국 광의통화(M2) 잔액 추이. (블룸버그=글로벌모니터)

최근 20년간 미국 광의통화(M2) 잔액 추이. (블룸버그=글로벌모니터)

이미지 확대보기
지난 17일 현재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총자산은 7조950억달러로, 2월말에 비해 2조9361억달러, 70.6%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 연준의 미국 국채 보유 잔액이 1조6953억달러, 68.5% 증가했고, 모기지담보부증권(MBS) 보유분은 5469억달러, 39.9% 확대됐다.

그 결과 같은 기간 중 본원통화의 잔액은 총 5조860억달러로 1조6470억달러, 47.9% 늘어났다. 은행 지급준비금이 3조1300억달러로 1조4901억달러, 90.8% 불어났고, 유통화폐는 1조9550억달러로 1569억달러, 8.7% 증가했다.

기업들의 자금수요가 크게 늘어나 은행대출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2일 기준 미국 광의통화(M2) 잔액은 18조2522억달러로 2월말 대비 2조7449억달러, 17.7% 확대되었다.

이는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블룸버그가 각국 중앙은행 자료 및 정부통계를 토대로 월간 단위로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5월말 현재 미국, 유로존, 일본, 영국 등 주요 4개국 중앙은행의 총자산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47.2%로, 2월말의 36.2%에 비해 11%포인트 상승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직전인 2008년 5월말에는 10.9%에 불과했다.

과거와 현대 화폐 증발의 유사점과 차이점

현대의 화폐가 완전히 허공에서 창출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화폐는 중앙은행이 주로 국채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발행된다는 점에서 해당국 정부의 채무상환능력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국채를 담보로 하는 중앙은행의 무이자 영구채)

그리고 화폐발행을 위한 중앙은행의 국채매입은 주로 유통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에 준하여 이루어지므로, 화폐의 가치에는 국채의 시장 가치가 완전히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중앙은행이 유통시장이 아닌 발행 단계에서 정부의 국채를 유통시장보다 비싼 가격으로 매입한다면, 이는 과거의 debasement와 매우 유사한 화폐가치 훼손 행위라고 간주할 수 있겠다. 이 경우 새로 발행된 화폐의 내재가치는 화폐의 액면 가치보다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이 때 중앙은행 총자산의 가치는 총부채(본원통화)에 미달한다. 이는 화폐의 신뢰를 저하함으로써 경제주체들의 기대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특히 미래에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통화를 거둬들이고자 하더라도 보유자산 부족으로 인해 부채를 충분히 상환할 수 없게 된다. 중앙은행의 긴축 능력에 제약이 생김으로써 인플레이션의 고삐가 풀릴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주요국 중앙은행에서 이런 형태의 발권 행위가 행해졌다는 보고는 아직 존재하지 않고 있다.

즉 현대 화폐의 가치는 기본적으로 해당국 정부의 상환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만일 해당국 재정이 과도하게 악화하여 신뢰가 낮아질 경우 해당국 화폐의 신뢰도 함께 하락할 것이다. 이때 해당국이 국채매입을 통해 화폐 발행을 더욱 늘리는 경우 화폐의 신뢰는 더욱 저하될 것이다. 중앙은행의 매입지원을 통해 해당국 정부의 채무가 규율 없이 더욱 증가하고 재정수지는 더욱 악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사상 최고 수준으로 상승한 주요 4개국 국채의 가격 또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국채의 유통수익률을 감안할 때, Covid-19 대응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이들 국가의 상환능력에 대한 시장의 신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 화폐가치의 근거가 되는 재정의 상환능력은 일차적으로 의회가 통제하며 그 통제에 대해서는 채권시장의 야경단(bond vigilantes)이 검증한다. 물론 야경단 역시 집단적인 도취감에 빠질 위험은 언제든지 존재한다.

국채를 기반으로 발행되는 현대 불환지폐의 사례는 19세기말 미국의 은행권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당시 미국 전국은행법에 따라 국채는 은행권 발행의 담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1880~1900년 기간 동안 국채는 높은 할증가격에 거래되었다. 당시 연방정부의 흑자재정으로 인해 1880년에 19억1900만달러이던 국채 발행 규모가 1892년에는 18억8000만달러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국법 은행들은 자행 은행권의 유통을 담보하기 위해 국채를 매수했는데, 이로 인해 국채는 더욱 희소해졌다. 이는 불환지폐가 그 자체로 반드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것은 아님을 반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재정적자가 크고 정부의 부채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화폐에 대한 신뢰가 저하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고 볼 수도 없다. 일본의 경우 일반정부의 부채가 국내총생산 대비 247.98%에 달하지만, 만성적으로 낮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의 상환능력을 평가할 때에는 민간의 소득 및 부(富)와 같은 잠재적인 증세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정부의 지출 확대와 이를 지원하는 중앙은행의 화폐 증발 역시 그 자체로 반드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증대하더라도 그 결과로 나타난 GDP가 여전히 잠재 GDP에 못 미친다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어렵다.

코로나바이러스 충격으로 인해 현재 미국의 GDP는 잠재 GDP를 현저하게 밑돌고 있으며, 앞으로도 수년간 그러한 상태가 지속될 전망이다. (지난 주 FOMC 위원들은 오는 2022년말이 되어도 미국의 실업률이 5.5%로 장기 지배적인 수준으로 추정되는 4.1%를 크게 웃돌 것이라고 예상하는 경제전망을 제시했다.)

상상 속의 항등식

'통화발행 증가 = 금값 상승'으로 이어지는 상상 속의 항등식은 고전적 화폐수량설에서 기인한 바 크다.

또한 통화주의 이론을 확립한 프리드먼은 'MV=PT' 형태 그대로의 방정식은 "하나의 항등식이며 자명한 진리이다"라고 규정하면서 "인플레이션은 생산의 증가보다 더 급속한 화폐 수량의 증가에 의해서만 발생하며, 발생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마치 화폐량이 산출량이나 물가수준 또는 명목소득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요소임을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되어 왔으며, 그러한 오해의 배경에는 고대에서부터 반복해서 나타났던 debasement 등과 같은 화폐 남발과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억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실제로는 화폐 교환방정식이 화폐수요이론으로 재해석될 수 있음을 보이려고 했다. 즉 교환방정식이 산출량이나 명목소득 또는 물가수준을 결정하는 이론이 아니라 화폐수요이론이며, 산출량이나 물가수준 또는 명목소득과 같은 변수들에 대한 이론으로 교환방정식을 이용하려면 화폐공급이론이나 다른 추가적인 가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프리드먼이 자산선택이론을 이용해 도출한 화폐수요함수에 따르면, 화폐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자산의 종류는 채권, 주식, 내구재, 인적자본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프리드먼은 경제에 채권과 주식 같은 화폐와 대체관계인 자산들이 많기 때문에 이 자산들의 수익률을 화폐수요함수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실물의 수익률인 인플레이션도 화폐수요함수에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리드먼의 이러한 화폐수량설 재해석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중앙은행 화폐공급과 실물 및 자본자산 인플레이션 사이의 괴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할 수 있다.

극심한 유동성 경색과 디플레이션 압력 등 경제위기에 대응해 중앙은행이 대규모의 화폐공급에 나섰으나, 전통적인 소비자물가지수(CPI)의 인플레이션은 10년 이상의 장기간에 걸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 관련기사: 인플레이션을 위한 레시피

대신 주식, 채권, 주택 등 자본자산의 가격은 대폭 상승했다. 이는 사람들이 화폐시장에 나타난 초과공급에 반응해 적정 보유량 이상의 화폐를 자본자산 분산 매입에 사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관련기사: 주식을 사는 이유

하지만 이러한 화폐 초과공급이 왜 실물자산에 대한 분산매입에는 상대적으로 덜 사용되었으며, 더 나아가 이자율 변동에 대한 실물자산과 자본자산의 탄력성이 왜 두드러지게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연구가 나와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는 현재 중앙은행이 직면해 있는 가장 큰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국을 중심으로 전세계 경제가 갈수록 강한 물가하락 압력을 받고 있는 가운데,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대응은 실물 경제를 진작하고자 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보다는 자본자산시장의 과열만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산배분 전략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앞으로는 '중앙은행 통화공급 확대는 곧 화폐가치의 훼손 및 인플레이션'이라는 일방적 사고에서 벗어나, 금융위기 이후의 경험을 토대로 화폐와 실물 및 자본자산 사이의 보다 현실적인 상호관계를 연구할 필요가 높아졌다고 하겠다.

다시 결론을 주장하건대, 금에 투자하는 것은 수익 가능성이 높은 합리적 투자가 아니다. 향후 유의미한 가격상승이 발생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화와 상상에 기반한 행운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지난 3월에 주장했던 금에 대한 관심은, 당시에도 설명했듯이, '통화증발 = debasement = 금값상승'이란 상상 속의 항등식에 기댄 랠리에 단기 전술적으로 편승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전술적 가치는 사라졌다.

사족

지난 18일자에서 주장했듯이 인플레이션은 크게 둘 중 하나의 경우에 발생한다. 1) 경제의 총수요가 총공급능력을 지속적으로 웃돌거나, 2) 화폐에 대한 신뢰가 순식간에 추락하는 때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물가수준의 상승,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갑작스러움'을 특성으로 하는 2) 형태의 인플레이션은 주로 이머징 마켓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1970년대 미국의 경우는 장기간의 1) 국면을 거쳐 2) 국면에 돌입한 사례였다. ☞ 관련기사: 중앙은행의 재정정책 개입

2)가 발생하는 이머징마켓은 대개 과도한 국제수지 적자와 그에 따른 외환보유액 감소 등과 같은 대외 불균형에 장기간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이머징 국가가 자국 화폐의 가치를 뒷받침하는 외환(正貨) 이상으로 많은 화폐를 발행하면 어느 순간 급격한 신뢰상실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현대판 debasement 인플레이션이다. 그런 점에서 이머징 통화는 달러 본위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달리 선진국 통화는 자국 재정을 본위로 삼고 있다. 즉, 선진국 통화가 2) 형태의 인플레이션 압력에 노출된다면, 이는 화폐 이전에 재정의 상환능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2) 형태의 인플레이션은 1)이 없이도 발생할 수 있다. 수년전 그리스 등 유로존 주변국에서 나타났던 위기가 2)의 변형된 사례라 할 만하다. 이머징에서는 1) 없는 2) 형태의 인플레이션이 곧잘 목격되는데, 2015년 하반기의 브라질이 대표적 사례다.

1970년대말에 나타났던 2) 형태의 미국 달러 위기는 금본위제 폐지 이후 변동환율제로의 이행 과정에서 나타난 전반적인 화폐혼란 성격이 강하다.

달러가 35달러당 금 1온스로 너무 장기간 고평가 되어 있었고, 사실은 무엇보다도 특히 금값이 너무 장기간에 걸쳐 1온스당 35달러로 저평가 되어 있었는데, 이 강제적 고삐가 풀리면서 금값이 뛰쳐 오르게 되었으며, 이는 1)과 맞물려 대중들에게 '전형적인 debasement' 데자뷔를 야기했던 것이다.

이 사례를 제외하면, 변동환율제 체제에서 선진국 통화에서는 아직까지 2) 형태(화폐신뢰 상실)의 인플레이션은 목격되지 않았다.

* 참고자료

제프리 잉햄, 『돈의 본성』, 홍기빈 역, 삼천리, 2011

밀튼 프리드먼, 『화폐경제학』, 김병주 역, 한국경제신문, 2009

밀튼 프리드먼, 『선택할 자유』, 민병균·서재명·한홍순 역, 자유기업원, 2005

시드니 호머·리처드 실라, 『금리의 역사』, 이은주 역, 리딩리더, 2011

조장옥·이철인, 『거시경제학 제4판』, 홍문사, 2017

댓글 작성

0/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