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Monitor

금융억압에서 금융몰수의 시대로(I)

  • Analysis
  • 2013-03-27 09:13
  • (글로벌모니터 안근모 기자)
사상 최고치를 구가하는 뉴욕 증시를 두고 거품 논란이 분분하다. `거품`이라는 색안경으로 보자면 유럽 주요국의 주가 지수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거품 논의 뒤에는 동일한 경고가 따라 붙는다. "지금 이 랠리에 올라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하지만 지금의 선진국 주식시장 랠리는 강요된 측면이 강하다. 주식을 대신할 수 있는 이자부 자산에다가 주식보다 훨씬 거대한 거품을 씌워놨기 때문이다. 금융자산을 보유한 경제주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거대한 거품에 올라타거나 `좀 덜 큰 거품`에 돈을 묻거나. 미국의 기업들이 빚을 내서(채권 매도) 자사주를 사들이는(주식 매입)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재 미국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2%가 채 되지 않는다. 4~5%에 달하는 미국의 명목 국내총생산 성장률은 고사하고 장기적인 인플레이션 추세치(2%)에도 못 미친다. 이는 미국 국채를 사는 즉시 실질적으로 손실을 입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향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출구전략에 나서고, 그래서 시장 금리가 상승하게 된다면 "원금 보전"이라는 국채의 이점은 여지없이 허구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금융억압을 통한 실질적인 부채탕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산의 일정부분으로 계속해서 국채를 사고, 예금을 할 수 밖에 없다. 거대한 거품에 대한 투자 역시 강제되고 있는 것이다. 혹시 재발할지 모를 유동성 위기의 순간에 믿을 수 있는 것은 현금 또는 그에 준하는 국채 밖에 없기 때문이다.

금융기관에게는 건전성 규제라는 이름으로, 보험이나 연기금에게는 유동성과 안전성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나라와 같은 非기축통화 국가에게는 준비통화(reserve currency)라는 이유로 강제되기도 한다.

거대한 가격 거품, 실질적인 원금 손실에도 불구하고 국채와 예금을 매입할 수 밖에 없도록 강요된 현실을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 체제라고 부른다. 이 억압이 싫다면 `좀 덜 큰 거품` 즉 주식으로 자산구성을 변경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의 주식 랠리를 두고 `강요된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니면 억압을 수용하고 보험료를 계속 내는 수밖에 없다.

금융 억압이 강요한 예금자(채권자)들의 실질 손실은 채무자들의 이익을 의미한다. 이자율이 인플레이션에 비해 낮으면 낮을 수록, 혹은 이자율에 비해 인플레이션이 높으면 높을 수록 채무자의 실질 채무는 감소한다. 현행 글로벌 경제 위기가 과도한 부채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금융 억압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은 지난달 의회 증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축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높은 수익을 제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제가 최대한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건 다소 역설적인데, 시장금리가 올라가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저금리 정책을 쓰는 것이다."

금융자산 몰수를 통한 명목부채 탕감

최근에는 `금융자산 몰수`라는 형태의 부채탕감 방식이 등장했다. 키프로스 고액 예금주에 대한 손실분담(hair cut) 요구가 그것이다. 금융억압이 채무를 `실질적`으로 탕감하는 간접적이고 은밀한 정책이라면, 금융 몰수는 채무를 명목 그대로 탕감하는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행위다.

키프로스 예금주에게 부과하는 손실분담액 만큼 해당 은행들의 부채는 일거에 소멸된다. 키프로스 정부, 더 나아가 트로이카 채권단(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IMF)이 짊어져야 할 잠재 부채도 그만큼 경감된다. 공리(公利)를 명분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금융 억압이나 금융 몰수나 동일하다.

유럽연합은 이번 조치가 키프로스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 일회적인 것으로 유로존 여타 국가에서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위기의 전염을 막기 위한 수사일 뿐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특수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은행 예금이라 할지라도 원금을 몰수할 수 있다"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부채 위기가 당초의 기대와 달리 확산, 심화될수록, 이를 방어하고 치유할 공적 재원이 부족해질수록 부채탕감의 방식은 억압에서 몰수로 급진전되기 쉬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 자산 보유자들의 선택은 더욱 좁혀진다. 몰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실물자산인 기업(주식)을 매입하는 것이다.

美 연준 출구전략, `금융몰수` 형태의 가능성

현재 미국의 은행들이 연방준비제도에 예치해 둔 초과 지급준비금은 1조6000억 달러에 달한다. 양적완화가 지속될 경우 올 연말이면 이 돈이 2조 달러로 불어나게 된다. 논의가 분분한 연준 출구전략의 대상은 바로 이 돈이다. 이 돈이 대출로 풀리지 않도록 어떻게 묶어둘 것이냐가 이슈의 핵심이다.

연준에 맡겨진 초과지준은 은행들의 자산이자 연준의 부채다. 연준은 이 부채에 상응하는 자산(국채 및 모기지담보부채권)을 보유하고 있다. 부채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산을 매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연준은 막대한 자본 손실을 입게 된다. 1~2%대의 금리로 사들인 채권을 3~4%대에서 팔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연준의 손실은 미국 납세자들의 손실과 동의어다.

그래서 연준은 채권을 매각하는 대신 초과지준에 지급하는 이자율을 인상해서 묶어두는 방법을 강구중이다. 하지만 연준의 손익에 미치는 영향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이 방법은 심지어 월가의 `탐욕스런` 은행가들에게 막대한 이자를 지급하는 `비민주적`이고 `불공정한` 결과를 낳는다. 2조 달러의 초과지준에 연 2.5%의 이자(현재는 0.25%)를 지급할 경우 납세자들이 부담할 돈은 한 해에만 500억 달러에 달한다. 그렇다고 해서 출구전략을 쓰지 않는다면 미국과 전세계 경제는 인플레이션, 혹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만약 부채 위기의 해법이 억압에서 몰수의 형태로 일반화되는 상황이라면?

연준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2조 달러의 `초과` 지급준비금을 `필요` 지급준비금으로 전환한다면 고민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지급준비율을 대폭 인상하면 된다. 그러면 연준은 은행들에게 이자를 줄 필요가 없다. 은행들은 이 돈으로 대출을 할 수도 없다. 그리 생소한 정책은 아니다. 중국은 수시로 이 정책을 쓰고 있고, 우리나라도 가끔 활용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은행으로서는 연간 500억 달러의 기회 손실이 발생하겠지만, 버냉키 의장의 논리대로라면 공공의 이익은 결과적으로 은행에게도 이익이다. 은행이 꼭 손실만 보는 것도 아니다. 지준율 인상이 아닌, 채권 매각이나 금리 인상 방식의 정통 출구전략을 사용할 경우 은행들 역시 보유 채권 가격 하락으로 인한 손실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터키 중앙은행의 조치 - 대출 금리를 인하하는 대신 지준율은 인상했다. - 는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연준이 만약 이같은 방식의 출구전략을 사용한다면 미국의 시장금리는 덜 오르게 될 것이다. 지준율 인상으로 인한 은행들의 기회 손실은 예금자들에게 전가될 것이다. 과다 채무자의 부담이 완화되는 대신 저축자에 대한 금융 억압은 길어질 것이다.

이는 자산가들의 선택의 여지를 더욱 좁힐 것이다. 억압과 몰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기업을 사는 것이다. 비용 전가 능력이 뛰어나고, 글로벌 매출 분산이 잘 돼 있으며, 잉여 현금이 많아서 채권 이상의 안전성을 갖춘 초국적 대기업의 주식이 쉼없이 오르는 것은 그래서 불가피한 현상이다. 금융 억압 시대의 증시 랠리가 수익을 향한 몸부림(hunt for yield)이었다면, 금융 몰수 시대의 증시 랠리는 안전자산으로의 도피(flight to safety)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선택이 마냥 안전한 것만은 아니다. 우량 대기업들이 보유한 잉여 현금을 노리는게 헤지펀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리(公利)라는 이름의 레비아탄(leviathan)이 언제 어떤 형식으로든 이 돈을 침할 수가 있음을 잊지 않는게 좋다.

[안근모의 inside-out] 칼럼은 로이터(reuters)에도 함께 정기 게재됩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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