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말해지는 Gresham's Law는 정확히는 "정부가 한 종류의 화폐를 과대평가(overvalue)하고 다른 화폐는 저평가(undervalue)했을 때, 저평가된 화폐는 그 지역을 떠나거나 혹은 유통에서 사라져 축장되며, 반면에 고평가된 화폐는 유통 과정에서 넘쳐난다"는 것이다.
실은 이 법칙을 최초로 천명한 사람은 Gresham이 아니라, 지동설로 유명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였다(Gresham은 코페르니쿠스보다 몇 십년 뒤에 활동한 영국의 금융가이자 튜더왕조의 재무관이었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자 수학자 이외에도 잡다한 '자'의 경력을 갖고 있는데, 의학자 행정학자, 그리고 경제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화폐수량설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사람이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과학사적으로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지동설을 주장한 학자들이 있었으며, 13세기의 아라비아에서는 상당히 정교한 수준으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천문학 이론이 제시되었다. 그래서 일부 과학사가들은 코페르니쿠스가 단지 아랍의 천문학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흔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영어로는 Copernian Revolution인데 이를 '전환'이라고 번역한 것은 순전히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검열 때문이다)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단지 지구와 태양 사이에 누가 중심이냐를 따지는 천문학상의 '혁명'이 아니었다.
지동설이 당대에, 그리고 근대에 충격을 던진 것은, 이제까지 神이 우주를 관장하며, 신의 아들이 재림한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며, 따라서 신의 아들이 구원하려고 했던 인간이 이 세계의 질서를 대표한다고 믿었던 중세의 관념과는 달리 사물의 질서가 신이나 인간의 의지에 독립적일뿐만 아니라, 우선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지동설의 관점에서는 지구는 그저 별 볼일 없는 작은 행성에 불과하며, 동시에 이는 신은 고작해야 사물의 질서에 불과하며, 아무런 인간적 의지도 갖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현현한 신조차도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동설은 근본적으로 단지 중세의 '신학'에 대항했을 뿐만 아니라, 더 잠재적으로는 '인간'(철학적 인간학)에게도 대항하는 이론이기도 했다.
이같은 충격에 대응하여 근세 초기의 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그 때까지의 과학적 성과를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이 과학 내에서 신의 존재, 나아가 신이 보증하는 인간의 특수한 지위를 보존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근세 초기 철학자들의 가장 주요한 과제가 '신의 존재 증명'이었던 것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og Sum)로 유명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실은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심지어는 수학적 명증성을 가지고) 증명하려고한 시도였지만, 그 결과는 신의 무존재, 그러나 인간의 존재는 증명하는 역설로 끝나버렸다.
게다가 데카르트는 그 논증과정에서 관념(사고)이 바로 '인간'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인간의 육체는 어떻게 그 '사고'와 연계되느냐는 이차적 문제를 낳았다.
의학자이기도 했던 데카르트는(근대 초기 사상가들은 전원이 종합적 지식인이었다) 인간의 관념과 육체를 연결시키는 신비스러운 통로가 '송과선'(갑상선)이라고 주장했지만(호르몬이 말썽꾸러기라는 것은 당시에도 알려져 있었다),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데카르트의 제자인 말브랑슈가 제안한 'Deus ex machina'(기계속의 유령, 우연을 뜻함)라는 고대 희랍의 연극 장치였다.
즉 인간의 육체가 정신이 원하는대로 움직이는 것은 인과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 또는 신의 개입에 의한 합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철학적 인간학은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해서 그 뒤 300년 동안을, 사실은 지금까지도, 心身一元論이냐, 二元論이냐를 두고 다투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동설은 이론(지식)의 문제인 동시에 '권력'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만일 지동설이 옳다면, 그것은 기존의 근대 이전 사회를 유지하고 있던 (교회) 권력의 근거가 그 바닥에서부터 허물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간들에게 계시된 신의 질서가 아닌, 사물의 질서가 우주를 지배한다면, '계시'가 들어설 자리는 사라진다. 이는 동시에 그동안 계시를 해석하는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神官들의 밥줄이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지 신관들의 밥그릇이 문제가 아니라, 신관들의 이론 권력에 의거하여 대중을 지배하고 있던 세속 봉건권력의 근거도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지동설은 봉건 영주 사회의 종말을 고하는 북소리였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로 대표되는 기존 권력이 지동설 주장자들을 화형대로 보낸 것은 '신'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시에 정치적인 권력 투쟁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동설은 500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적' 성격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지동설은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행위와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질서, 즉 자연은 그 자신만의 고유한 법칙과 순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이 가능하며, 인간의 의식은 그같은 자연사적인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의 사고는 사물의 운행질서를 관장하는 신의 존재는 포기하는 대신에, 여전히 유지될 수 있는 '인간적 질서'라는 고유한 관념을 만들어냈다.
여기에서 '야생과 문명', '자연과 역사(혹은 '사회')', '날 것과 익힌 것', '(물리적)세계와 인간'이라는 근대에 고유한 이분법이 탄생했다.
사상적으로는 이 과정은 수백년이 걸렸다. 이같은 인간의 특수한 지위에 대한 관념은 정치적으로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통해 완성되었는데, 당대의 사상가들은 재치있게도 '(근대)시민은 프랑스 (혁명)헌법과 동시에 탄생했다'고 기술했다.
'천부인권'(인권은 침해불가능한 권리라는 개념은 인권에는 그 자연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라는 개념은 프랑스 헌법을 통해 절대적 명제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자연적) 인간'이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에 개입할 동등한 권리를 가진, 즉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정치적 인간(시민)'이 갑자기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 되었다. 동시에 이는 근대 국가의 성립을 의미했다.
자본주의 태동기를 살았던 코페르니쿠스는 인간사에 대해서도 자연사를 관찰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 결과가 화폐수량설(MV=PQ, 한 사회 내에서의 화폐의 총량은 유통되는 상품의 총량에 회전율을 곱한 것이라는 이론)이었으며, 이는 인간사인 경제(화폐)의 세계에도 그 자신만의 고유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개념은 인간들이 이같은 질서에 개입했을 때 빚어지는 왜곡과, 이 왜곡에도 불구하고 화폐 세계의 고유한 법칙은 관철된다는 개념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아마도 처음으로, 자본주의에 고유한 '법칙성'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법칙성은 자연사적 과정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의 행위와 의식에서 독립적이며 반드시 관철되는 것이라는 것을 기술한 첫번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동설의 혁명과 마찬가지로, 이같은 사고방식은 여전히 근대 이후의 세계(post-modernism era)를 논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진정한 의미가 제대로 음미되지 않고 있다.
Gresham의 법칙(실은 코페르니쿠스의 법칙이라고 불러야 옳겠지만)은 오늘날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현재의 통화체제는 크레딧을 기초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크레딧의 '보증자'는 정부(중앙은행)가 그 역할을 자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사회 내에서 추가로 생산되는 잉여(이윤)의 총량에 귀착된다.
만일 실물경제와 화폐 경제라는 이 두가지의 경제 과정 중에서 정부가 인위적으로 화폐적 측면을 과대평가한다면, 실물 경제를 반영하는 화폐는 퇴장(hoarding)의 과정을 밟게된다.
즉 증식하는 화폐를 보증할 수 있을 만큼의 이윤이 증가하지 않는(성장율이 크레딧 증가율을 하회하며) 조건 속에서 화폐 증식이 인위적으로 지속된다면, 성장(이윤)을 반영하는 화폐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거나 혹은 축장된다.
문제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거나 축장되는 화폐'가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이다. 흔히 이를 '금'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정확한 평가는 아니다.
정부의 경제 상태에 대한 개입이 극단화되면 금의 '가격'조차도 인위적으로 조작된다. 이같은 상황 하에서는 기존의 화폐 시스템 하에서 가장 '우량화폐'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현금'(cash)이며 '저축'이다.
미래의 청구권을 표시하는 크레딧 기반의 화폐 체제 하에서는 '현재의 청구권'을 가진 실물 화폐(physical currency)가 크레딧의 대립물로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화주의자들의 눈에는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모순의 결과물인 이같은 과정이 마치 경제주체들이 위험 선택을 기피하는 '디플레이션 압력'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들은 더 많은 크레딧을 발행하여 디플레이션을 처방하겠다고 나서며, 그 결과는 더 큰 축장 압력으로 나타난다.
즉 악화(성장의 보증이 없는 크레딧의 증가)가 양화(현재의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실물 화폐)를 구축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코페르니쿠스가 말했던 것은, 이미 자본주의 초기의 상업적 도시국가의 지배자들이 유혹을 받았던 초과 크레딧의 발행, 즉 금의 함량을 낮춘 화폐(위조 화폐에 해당한다)의 발행이 오히려 금을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게 만들어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신용화폐 체제하에서는 미래에 상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청구권들(크레딧, 채권의 형태로 표현된다)이 과잉 발행되면, 그 청구권을 당장 행사할 수 있는 화폐 형태(현금)가 선호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현재의 통화주의 체제의 파국적 결말을 우려하는 미국과 유럽의 이코노미스트들이 '현금 사용 금지'를 주장하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는 이같은 극단적 개입은 신용화폐 체제 자체에 대한 불신을 불러올 수도 있으며, 그 때는 비로소 금이 새로운 양화로서 역할을 하게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신용화폐 체제 내에서의 각기 다른 화폐 형태에 대한 '양화/악화'의 대립이며, 이 신용화폐 체제 자체와 대립하는 전망을 보여주는 단계로 나아가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신용화폐 체제에는 두가지 근본적 위험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초과 크레딧 즉 과잉 부채로 인한 부채 디플레이션 압력, 다른 하나는 이를 해결하겠다고 크레딧을 무한 발행하는 순간에 나타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 위험이다. 여기서 후자는 전자의 결과이다. 후자의 국면이 전개될 때 비로소 금은 새로운 양화로서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같은 과정은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초과 크레딧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행정적 통제 능력, 또는 전쟁을 통해 초과 착취를 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국가에 자신의 이권이 달려 있는 기존의 경제 지배층들의 문제 때문에(예컨대 월가 전체가 달러화 권력에 기생하고 있다), 뻔히 보이는 이론적 실천적 실패 전망에도 불구하고 더 큰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는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초의 IMF 컨퍼런스에서 전 영국 금융안정위원회 아데어 터너 위원장이 'outright debt monetization은 정치적 이슈'라고 선언했을 때, 그는 경제학자로서는 아주 드물게 솔직한 고백을 했던 것이며, 실제로 현재의 자본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집단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보여주었던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예컨대 JP 모건의 CIO인 Michael Cembalest가 2016년 전망에서 놀라움을 표현했던 일본의 사례를 보자.
그는 일본중앙은행의 어마어마한 화폐 발행에도 불구하고 그 '혜택'이 감소하고 있는 현상을 한 장의 챠트로 제시한다.
지난 2012년 이후로 일본 중앙은행의 제무제표는 무려 144% 증가했다. 그리고 일본 엔화는 실질상으로 27% 절하되었다. 그러나 통화량은 고작 연률로 3.9% 증가에 그쳤으며 은행 대출은 연률로 2.4% 증가에 그치고 있다. 명목 GDP는 1.9%, 근원 인플레이션은 1.3% 상승에 그쳤고, 실질 GDP 성장률은 0.8% 그쳤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아베노믹스로 일본 기업들의 명목 이윤은 크게 증가했지만, 민간가계의 소득과 소비는 전혀 증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BOJ QQE는 민간 가계의 실질 구매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민간가계는 오히려 소비를 줄이고 실물화폐(또는 cash equivalent로서의 일본 국채)를 축장할 수밖에 없으며, 일본 기업들로서는 이같은 가계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임금 인상의 결정적 요인이 되는 투자를 늘릴 이유가 없다.
따라서 기업의 명목 이윤은 증가하지만, 내수는 오히려 침체하며 당연히 성장도 없다. 늘어난 것은 오직 명목 화폐량뿐이다. 즉, 악화만이 증가했을 따름이다.
Cembalest도 일본중앙은행이 지난해 하반기에 추가 완화책을 결정하지 못한 것은 내수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면서, 자신들의 소식통에 따르면 2016년 11월까지는 일본 중앙은행은 '선제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미묘한 함정이 숨어 있다. 그는 현재 추세대로 BOJ가 QQE를 한다면, 올해 말에는 은행권에서는 더 이상 BOJ에 매각할 국채가 남아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지난 2년째 BOJ는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보다 더 많은 국채를 매입하고 있다).
그렇다면 BOJ는 '테크니컬리' 더 이상 QQE를 할 수 없다.
다른 대안은 '비은행권 민간'으로부터 일본 국채를 매입하는 방안이다. 이는 일본 민간가계가 보유하고 있는 국채를 직접 매입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Cembalest는 적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 관한 한, Cembalest의 평가는 솔직하지 않다.
다른 외부적 요인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중앙은행이 민간가계가 보유한 국채를 매입하는 순간 일본에서 자본 탈출이 시작될 것이다(엔화를 포기하고 새로운 양화를 찾아 나선다).
왜냐하면 이 순간은 중앙은행의 정책이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간주되며, 이 때는 엔화 약세를 막을 수 없고 국내 경제의 극심한 침체에도 불구하고 엔화 약세로 인한 물가 상승이 나타난다.
따라서 BOJ는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 압력에 처하게 되며, 이는 국채 가격을 폭락시키고 엔화 약세를 더욱 부추기게 될 것이다.
즉, 중앙은행이 은행시스템 바깥의 민간 보유 국채에 손대는 순간이 바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이같은 재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은 두가지 방책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하나는 국채 수익률을 올리지 않고 추가 국채 발행(재정 적자 규모 확대)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역사적으로는 이같은 방안은 '전쟁 공채'였다. 일본 국채 시장은 외국인 투자 비중이 작기 때문에 전쟁 공채의 순간에는 일본 민간 가계의 자본 탈출은 제한적이 될 것이다.
즉, 일본은 올해 내에 전쟁을 위한 준비를 마칠 내적인 필요가 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일본은 직접 전쟁 당사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조건이 붙는다. 즉 일본은 주변국의 전쟁이 필요한 것이지, 자신들의 전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른 한가지 방안은 일본 중앙은행이 보유한 정부 국채를 '소각'(debt write-down)하고 정부는 추가 재정적자를 늘리는 방안(outright debt monetization에 해당한다)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국제적인 '용인'이 필요하다. 일본 엔화는 SDR에 편입된 보유통화 지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의 동의가 없이는 사실상 이같은 조치를 취할 수 없다.
아데어 터너가 권한 것은 이 노선이었다. IMF에서 이 방안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당사국들 사이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졌음을 시사하지만, 여전히 장벽은 높으며 변수가 많다.
어쨌든 BOJ는 11월까지는 일본 정부의 '공작' 능력 여부를 평가해가면서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 중에는 BOJ가 추가 QQE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엔화는 오히려 강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엔화가 안전자산이어서, 혹은 양화이어서는 아니다. 자금의 '흐름'은 순전히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전년 동기 대비, 또는 전분기 대비로 가속도가 붙지 않는 한, 엔화의 세계에서는 다른 화폐들이 더 빨라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따름이다.
이는 악화의 세계에서도 고유한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끊임없이 새로운 악화(추가 크레딧)이 기존의 악화를 밀어내지 않는다면, 기존의 악화들이 '양화'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 통화시스템은 끊임없이 더 나빠져야만 현재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상황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일본이라는 '국가'가 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는 한(예컨대 전쟁이나 다른 국가들을 설득하는 것), 일본 경제는 이미 black swan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은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오상용 에디터가 즐겨 말하듯이, 글로벌 시스템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을 미리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 세계는 진정한 'Junk'의 단계에 도달했다.
정말로 일본은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이 졍크가 얼마나 이 세계에 침윤되어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미국의 지난 2012년 이후 junk credit 발행 규모(2007년과의 비교)
그러나 이 junk는 다음 위기의 '원인'이거나 혹은 '진앙지'인 것도 아니다. junk는 단지 표현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원인은 1970년대 초반 어느날부터인가 자본주의의 이윤율이 도저히 역전불가능한 추세로 감소했기 때문이며(즉 유기적 성장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며), 그 이후의 이윤은 중앙은행과 정부가 발행한 초과 크레딧으로 인한 명목상의 인위적 외삽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위기는 현재의 통화시스템 자체이며(junk는 단지 그 단말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 진앙지는 '통화'(currency)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취약한, 가장 junk스러운 통화들로부터 하나씩 무너지는 장면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위기는 항상, 'slowly and suddenly' 진행된다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 Carmen Reinhart 하버드대학 교수가
지난해 12월 31일자 칼럼에서 경고한 것처럼, 연쇄적인 신흥시장 디폴트 위기가 출현하고 있다.
BRICS국가들 가운데 적어도 3개 국가(러시아, 브라질, 남아공)은 통화 위기를 겪게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그 위기를 피해갈 여지가 있지만, 브라질과 남아공은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유로존 주변부 국가들 및 동구 국가들의 통화 위기도 산발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 미국은 이미 지난 4분기 중에 경기 침체에 돌입한 것으로 판단한다. 서비스섹터의 확장 추세는 1분기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 미국 기업들의 이윤율은 폭락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번에는 배당금이나 stock buyback이 이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S&P500 지수 상장 기업 가운데 무배당인 74개 기업의 주가는 지난 2015년 한 해 동안 3.85% 상승한 반면에, 배당금을 지불한 기업들의 주가는 평균 5.15% 하락했다."(Bespoke)
이미 stock buyback을 시행하는 기업들의 주가도 시장 수익률을 하회하고 있다.
즉, 미국의 증시 투자자들은 이미 주가에 대한 valuation 척도를 바꾸고 있다. 더 이상 주식은 '채권'처럼 간주되지 않는다. 아니, 졍크 본드처럼 간주된다.
'투자 수익'(배당금이나 자사주 매입)이 아니라 기업들의 '가치'가 valuation의 척도가 되고 있다는 것을 Bespoke의 지적은 보여준다.
이 가치는 '성장성'이나 '이윤'이 아니라, 존속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부채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이 가치조차도 더 이상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못할 것이다.
- 중동은 이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준전시 상태에 돌입한 것처럼, 어디로 튈지 모른다(현재로서는 전면적인 충돌 직전에 극적인 소강상태로 접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유가 반등도 거기까지일 것이다).
그러나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를 빌미로 한 유가 상승은 글로벌 경기 침체를 결정적으로 가속화시키는 역할을 하게될 것이다. 지금의 글로벌 경제 상태 하에서는 유가 상승은 오히려 부담이 된다.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차기 권력 향배가 혼전 양상이기 때문에, 글로벌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 중국은 미국과는 달리, 부실 크레딧 청산 및 과잉 설비 해소라는 두가지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중국인민은행이 'flexible' 통화정책을 외칠 때마다, 금융 시장의 동요가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미 통화정책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국면을 지나간 것으로 보이며, 자본 통제가 병행되어도 그 효과를 점치기 힘들다.
- 연준이 마이너스 금리를 결정해도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2012년 QE3가 결정되었을 때, 1000일 동안은 음풍농월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연준이 마이너스 금리를 시행한다면 500일이 고작일 것이다.
그리고 더 힘든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CRB(톰슨로이터의 원자재 지수) 챠트가 돌아서지 않는 한, 실물 경제의 위기는 2008년보다 더 험난할 것이다.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