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을 교과서적으로 '지속적으로 물가가 하락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24일 "일본은 거의 디플레이션을 물리쳤다"고 말한 것은 과민성 대장염 치료제를 과다 투여한 탓에 발생한 섬망 현상이거나, 혹은 노골적인 거짓말이라고 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아베의 말은 사실이다. 다만 아베가 말하지 않은 것은 퇴치된 것이 '누구의' 디플레이션이냐 하는 것뿐이다.
표면적으로는(가격의 측면에서는) 아베 총리의 '거의 퇴치' 발언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일본 CPI 추이 (YoY)
소비자 물가는 상승은 커녕, 아베노믹스 이후의 일시적인 물가 반등은 올해 초부터 급격하게 꺾이기 시작했다(그나마 아베노믹스 초기에 물가가 상승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소비세 인상 탓이었다). 따라서 소비자물가(노동력 재생산 비용)의 측면에서는 일본은 여전히 디플레이션 압력 하에 놓여있거나, 최소한 아주 낮은 인플레이션 상태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주체'를 바꾸어 보면 디플레이션은 사라지고 있다.
다음은 Markit이 발표(24일)한 일본의 제조업 PMI 지수(예비치) 가운데 하위 항목인 input/output price 추이다.
일본 제조업 PMI input /output price 추이
지난 2002년을 기점으로 했을 대, 일본의 제조업체들은 금융 위기의 일시적 시기를 제외하고는 지난 13년 내내 원가(input price)가 출하가격(outpur price)을 상회하는 '압력'에 시달렸다.
즉, 기업들은 원가 상승분을 소비자 제품 가격에 전가시킬 수 없었으며, 그로 인해 이윤율이 낮아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지난 10여년 동안의 일본의 자산 디플레이션의 원인이었다.
기업 차원에서는 지난 10여년 동안의 조건 하에서는 생산 기지를 일본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는 압력으로 작용하며(이른바 제조업 공동화 현상의 심화), 국가적 차원에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기업들의 원가 상승 부담을 줄여줄 수 있도록 원자재 가격을 낮춰야 한다는 과제, 즉 지속적으로 엔화를 강세로 유도해야 한다는 과제로 다가온다.
그런데 지난 2014년 하반기부터는 기업의 원가와 출하가격 사이의 격차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 조사는 PMI 설문 응답 조사이기 때문에 '추세'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인 %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2014년 하반기 이후 원가와 출하가 사이의 격차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은 기업의 관점에서는 곧 이윤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영업 마진율의 개선). 이 때는 기업들에게는 출하가를 높이지 못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출하가는 아베노믹스 이후에도 거의 증가하지 않았지만, 즉, 아베노믹스 하에서 소비 증가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지만, 원가 부담은 감소했고, 이는 다시 기업에게 매출 정체에도 불구하고 출하 가격을 높이지 않아도 기업 현금 흐름이 개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투하 자본의 '생산성'이 높아진 것이다. 그리고 '가치'의 관점에서 인플레이션이란 외적인 확장이 아니라(즉, 성장의 증가가 아니라), 자본의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디플레이션이란 생산성의 지속적인 하락 추세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아베의 '거의 퇴치' 발언은 기업의 관점에서는 사태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다만'이 문제다.
일본의 9월 PMI에서도 출하가와 원가는 모두 마이너스 영역으로 떨어졌다. 즉, 제조원가와 판매 가격이 동시에 하락하고 있는 것이다(가격의 측면에서는 이는 고전적인 디플레이션 현상에 해당한다).
흥미롭게도 지난 사례를 보면, 일본은 경기 침체가 발생할 때는 원가와 출하가 사이의 갭이 줄어들거나 심지어는 역전되는 현상, 즉 기업 이윤율이 개선되는 현상을 보인다. 이는 국제적인 경기 침체로 인해 원자재 가격이 엔화 강세 속도보다 더 빠르게 하락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11-2012년에 사이의 output price 하락기는 글로벌 경제가 2009년 회복 싸이클이 끝나고 다시 침체로 빠져들던 시기였다. 이 침체는 중앙은행들의 공조 금리 인하와 QE 시리즈로 지연되었다.)
다른 말로 해서, 일본의 기업들은 빠르게 경기 침체로 돌입하는 환경 속에 놓였기 때문에 이윤율이 개선되고 있는 중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아베 총리에게는 아주 역설적인 얘기겠지만, 아베노믹스의 실패, 즉 일본의 경기 침체가 발생하자 기업들의 이윤율이 개선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아베노믹스 시행 초기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는 기업들의 디플레이션 압력은 지속되었다). 그러니 아베 총리가 '자랑'할 건덕지는 없다.
이는 PMI의 다른 하위 항목인 고용과 수주 잔량 지표에서도 드러난다. 고용 지표는 9월 중에 다시 마이너스 영역으로 하락했다. 무엇보다도 수주 잔량이 지난 2012년 하반기 이후의 삼각 수렴형의 하단을 깨고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즉, 아베노믹스 이후의 상승 추세선이 깨어진 것이다. 이는 기업들의 '주문' 감소가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들이 생산을 줄이면 고용은 감소하고, 차례로 소비가 감소한다. 9월 PMI는 일본에서 이같은 현상이 동시에 모두 뚜렷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때의 최악의 시나리오는 지난 2008년과 같이 input/output price가 모두 급격하게 하락폭이 깊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베가 그냥 '디플레이션 퇴치'가 아니라, '거의'라고 단서를 붙인 이유일 것이다. 즉, 일본 경제는 경기 침체로 돌입하는 초입기에서 기업 이윤율의 상대적 개선(디플레이션 압력 감소)과 '가격'의 하락(소비자 물가와 생산자 물가의 동시 하락)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기 침체 초입기의 기업 이윤율 개선 현상(이윤 총액의 개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이윤율'의 개선을 의미한다. 이윤 총액의 증감 여부는 전적으로 엔화 가격에 달려 있다)은 단기적으로는 자산 가격에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원자재 가격이 바닥을 찾거나, 혹은 경기 침체의 골이 아주 깊어지면 오히려 급격하게 자산가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 때는 일본 당국은 오히려 엔화 가치를 절상시켜야 하는 압력에 직면한다(이 역시 이윤 총액 감소를 유발하기 때문에 자산 가격에는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일본 경제의 85%는 '내수'이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이 엔화 가치 절상을 회피하려 한다면 그 때는 오히려 노동 가격(임금)을 낮추려고 할 것이다(이것이 한국의 노동대타협의 본질이다).
미국 경제에서는 이같은 '물가 압력'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
"평균 원가 부담은 9월 중에는 감소했다. 이에 따라 지난 4개월 연속의 원가 상승기가 끝났다. 제조업자들은 원자재, 특히 금속재와 오일 관련 비용의 감소를 원가 부담 감소의 원인으로 꼽았다. 반면 공장 출하 가격 지수는 지난 2012년 8월 이후 처음으로 하락했다. 조사 대상자들은 하락하는 원자재 가격과 경쟁의 격화, 그리고 취약한 수요 조건이 출하 가격 하락을 가져온 원인이라고 대답하고 있다"(Markit 9월 미국 제조업 PMI 코멘트 중에서. 9월 23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장 출하 가격 지수는 지난 2012년 8월 이후 처음으로 하락했다"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원인 중에 '취약한 수요'(softer demand)가 포함되어 있다('경쟁의 격화'도 실은 같은 현상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미국 제조업체들은 설비를 거의 늘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제조업 PMI 상으로는 일본과는 타이밍에서는 약간 차이가 나지만(세계적으로 일본과 독일의 제조업이 '경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본의 뒤를 밟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난 1년 여동안의 달러화 강세기에서도 미국 기업들의 이윤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원자재 가격이 여기서 더 하락하지 않는다면 이윤율도 빠르게 하락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진정한 '주체'인 기업들의 이윤율의 하락은 자본의 생산성 하락, 즉 인플레이션 압력을 의미한다.
이 국면에서는 중앙은행(연준)은 금리를 인상하든지, 혹은 QE를 재개해 기업들의 '현금'을 보충해주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미국이 장기 국채 수익률을 안정시킬 수만 있다면 금리 인상이 보다 손쉽고 체면(신뢰성) 살리는 선택이 되겠지만, 금리 인상으로는 침체를 지연시킬 뿐 경기 반등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보기에는 불확실성이 너무 심하다.
QE 재개는(혹은 마이너스 금리)는 낮은 생산성 하의 가격 인플레이션(스태그플레이션)을 야기할 위험이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국제 공조는 필수적이며(아니면 지정학적 위기를 통한 국제적 강제가 수반되어야만 하며), 그 효과는 여전히 불확실하다.